지난 12월23일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가 국회 앞 차별금지법 쟁취 농성장 앞에 서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바로 어제였던 지난해, 국회에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또다시 미뤄졌다. 그러곤 입버릇처럼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다’는 주장을 내밀었다.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인권은 없다”는 절박한 목소리에도 국회는 귀를 닫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처음 본격화한 게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7년.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그사이 우리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시민단체 162곳이 어깨를 결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안전하고 존엄할 권리를 말하는 간절함이 모욕과 혐오로 얼룩지기도 했고,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제정 과정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포함했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으며, 퀴어퍼레이드는 저지당했다. 여성혐오 범죄인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은 정신장애인을 낙인찍는 범죄종합대책으로 이어졌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 유성기업 노동자에 대한 괴롭힘으로 노동차별의 위험한 현실이 다시금 알려졌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은 신분증이 없어 의료보험 등 사회적 지원을 받기 어렵고, 차별적인 내용을 담은 교육부 국가수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만들어졌다.”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보편 권리를 담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특정 집단이나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지난 23
일 <한겨레>와 만난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별, 학력, 경제력, 피부색, 신체 조건, 비정규직, 성적 지향 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상 속에서 노골적 차별이 일어난다”며 “지금 우리 사회는 이걸 막을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차별금지법 쟁취 천막농성장과 인근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대표는 “이미 시민들과 사회는 바뀌고 있다. 바뀌지 않는 건 정치권이고, 이제 이들이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때”라고 강조했다. 2022년 첫날, <한겨레>는 이 대표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함께 토요 릴레이 연재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를 시작한다.
기득권 반발로 법 제정 무산…
그사이 강남역 여성, 변희수 하사 등 비극 잇따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10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 국가인권위원회법(2001년)이 제정이 됐지만, 인권위에 관한 법률로서 한계가 있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인권운동 전반에 있었죠. 2003년부터 인권위에서 차별금지법안 연구가 시작됐고, 2007년 당시 참여정부가 법무부를 통해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내놨지만 첫번째 좌절을 겪었습니다. 이후 노회찬(2008년), 권영길(2011년·이상 민주노동당), 박은수(2011년·민주통합당), 김재연(2012년·통합진보당), 김한길·최원식(이상 2013년·민주통합당) 의원 등의 법안이 차례대로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되거나 철회됐습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선 법안 자체를 내지 않았고요. 이번 국회에선 장혜영 정의당 의원 대표발의를 포함해 4건이 나왔는데 국회가 법안 심사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최근 사회적 화두가 ‘공정’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차별금지 제도화는 이미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 같습니다. 법 제정에 반대하는 논리가 옹색할 텐데요. “2007년 첫 차별금지법안 때부터 줄기차게 반대한 세력들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 등 재계가 학력차별 금지를 법제화하면 고용이 어렵고 기업 활동 자유가 제한된다는 식으로 반대했어요. 보수 개신교 단체들은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진다’,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유포했어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논리까지 동원했죠. 당시 정부가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서 학력, 가족 형태 등은 차별금지 대상에서 뺐습니다. 시민사회단체 쪽에서 ‘차별받아도 되는 인권은 없다’며 반발했고, 결국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됩니다. 이듬해 노회찬 의원을 통해 다시 법안을 냈지만, 국회가 처리를 미루다 또 폐기됐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죠.”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어떤 이유로 반대하는 건가요? “차별받는 약자들을 혐오 대상으로 만들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방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과 정책에도 반대합니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과 달랐을까,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 대목이 궁금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심각한 차별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아요.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은 어떤가요? 여성들이 지금도 혐오 범죄로 죽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더 가혹한 노동환경에 내몰려 2016년 한 청년이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숨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향한 혐오 발언도 있었고,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회사가 싫어하는 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차별받았습니다. 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도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은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공간으로 호출돼 노골적인 차별을 당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걸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내 주변에서 언제든 일어날 만한 일들입니다. “더 손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2010년 한 청각장애인이 대졸 신입사원 채용에 응시했는데, 회사가 토익(TOEIC)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요구했어요. 시험엔 듣기가 포함되기 때문에 청각장애인은 능력과 상관없이 채용 기회를 잃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이 일부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는 얘기도 하고 싶어요. 저상버스가 있으면 장애인들만 도움받는 게 아니잖아요.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어떤가요. 무거운 짐을 든 사람, 계단 오르내리기 버거운 어르신, 아이 안은 부모들에게도 모두 좋은 거잖아요. 약자,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모두의 권리 증진과 이어져 있고, 차별금지법은 이걸 돕는 법입니다.”
지난해 이 대표는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와 함께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요구하며 부산을 출발해 한달여간 500여㎞를 도보 행진했다. 앞서 6월, 10만명 넘는 시민들의 국회 국민동의청원으로 소관 상임위원회에 차별금지법안이 자동 회부됐다. 하지만 서울 국회 앞에 도착한 11월12일, 이들을 기다린 건 또 한번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이날 국회는 차별금지법안 심사 기한을 21대 국회 만료일인 2024년으로 연기했다. ―지난해 차별금지법 제정에 한걸음 더 다가섰지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차별금지법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우울한 얘기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차제연을 조직화하고 10년 넘게 쌓인 투쟁의 시간이 올해 큰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해요. 10만명 넘는 시민들이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에 참여해서 결국 국회에서 상임위를 움직이게 했잖아요.” ―법 제정에 대한 여론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맞아요. 국민 인식조사를 보면, 국민 70~80%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외연이 확장된 거죠.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힘이 쌓였고, 더 단단하게 조직화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포괄적’ 금지법이어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연령차별금지법, 비정규직차별금지법 같은 개별 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차별은 장애, 성별, 성적 지향, 나이, 비정규직 등 하나의 이유만으로 단편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요. ‘학력이 낮으면서 장애를 가진 노인 여성’처럼 복합적인 이유로 차별을 당할수도 있어요. 아울러 우리 사회가 일상 속에서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그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를 제도화로 보여주자는 겁니다. 인권위도 지난해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 의견표명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성별, 장애, 나이 등 다양한 속성이 중첩되어 있고, 일상에서 이들 요소들이 서로 연결된 경험을 하게 된다. 차별을 정확히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차별 현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법률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이 대표는 성소수자로서 2003년부터 게이 인권단체 ‘친구사이’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뮤지컬 배우이자 칼럼니스트이면서, 학생인권 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등에서 무지갯빛만큼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차별받는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게이 남성’이라고 하면 내 정체성을 부모나 학교, 직장에서 감춰야 해요. 존재를 드러내기 전에 자기 검열을 하는 거예요. 사회적 차별이 내 스스로 원치 않는 이중생활을 하게 만들어요. ‘차별금지법은 같은 시민으로 권리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 국가만 인정을 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도 마찬가지다.’ 이 법을 통해서 권리의 주체로 존중하라는 것이에요.” ―차별금지법이 일부 그룹, 소수자들을 위한 법으로 호도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23가지 차별의 유형’으로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와 민족,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신체조건, 종교, 사상,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학력, 병력, 건강 상태,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등으로 구분했어요. 이런 문제들에서 나와 내 가족, 혹은 주변 사람들이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차별금지 법제화 찬성’ 88.5%,
법 만드는 국회·정치권이 시민의식에 못 미쳐
“대선 앞두고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총력전…
반드시 법제화 이뤄낼 것”
‘사회적 요구’는 이미 끓는점에 와 있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벌인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를 보면, 차별금지를 위한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88.5%에 이른다. ―희망적인 변화들도 있을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최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가 기업 내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을 모범단협안에 포함시켰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동성 커플을 배우자로 인정하거나, 꼭 법적 혼인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으로 인정받을 길을 열어놨습니다. 정부나 국회가 하지 못한 일을 노동계가 시작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번져나가면 사회 전체에 변화가 올 겁니다.” ―결국 정치권이 움직여야 하는 문제인데요. “뉴질랜드, 독일, 멕시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이스라엘, 캐나다, 유럽연합(EU) 등이 차별금지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정치권이 알아서 만든 게 아니에요. 누군가 먼저 차별금지를 말하고, 투쟁해서 얻어낸 것입니다. 우리 정치권에도 ‘당신들은 도대체 뭐 할 것이냐’고 묻고 싶은 거예요. 정치권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데요. 시민들과 사회는 바뀌고 있어요. 바뀌지 않는 건 정치권이고, 이제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때입니다.” ―대선 국면이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요? “1~2월 대선 국면에 더 강력하게 정치권을 압박할 겁니다. 국회 앞 ‘2021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쟁취 농성단’을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가칭)으로 전환할 계획입니다. 차별금지법이 먼저인 이유를 시민들과 함께 확인하고, 여론이 술렁이도록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차별받은 이들이 우리 이웃임을 드러내고, 나의 일터, 학교, 일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을 막을 법을 올해는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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