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사업주로 명의를 빌려줬던 20대 여성이 국민연금 사업주 보험료 부과처분에 불복해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신명희)는 20대 여성 ㄱ씨가 국민연금공단을 상대로 낸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의무 부존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고 26일 밝혔다. 재판부는 ㄱ씨가 가정폭력 위험을 피하고자 명의를 빌려줬던 점을 인정하면서, 국민연금공단이 사업주 명의를 아버지 ㄴ씨로 바꾸고 보험료 4900여만원을 ㄴ씨 앞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ㄱ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버지 ㄴ씨의 가정폭력 피해를 입었다. 어머니가 코뼈와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한 뒤 어머니, 언니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면서 살았다. 2007년 어머니가 이혼한 뒤로는 줄곧 어머니와 생활해왔다. 그러다 ㄱ씨가 21살이었던 2015년 아버지 ㄴ씨는 ㄱ씨가 재학 중인 서울의 한 대학에 찾아가 자신이 운영할 철구조물 제조·도장업체의 사업주로 이름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ㄱ씨는 이 요구를 거절하면 자신에게도 심한 폭력이 행해질까 두려워 명의를 빌려줬다. ㄴ씨는 2015~2016년 딸 이름으로 사업을 하면서 딸 앞으로 부과된 부가가치세 5609만원, 국민연금 4910만원을 미납했다. 이후 ㄴ씨의 사업장은 2016년 10월 사업장가입자 자격이 상실됐고, ㄴ씨는 2021년 4월 숨졌다. ㄱ씨는 해당 세금과 보험료가 자신이 부담할 돈이 아니라며 국가기관을 상대로 다퉜다. 먼저 과세당국에 가정폭력 피해 사실과 실제 사업주는 ㄴ씨임을 소명해 2020년 2월 국세청으로부터 부가가치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받았다. 국세청 결정을 토대로 같은해 11월 국민연금공단에 “이 사건 사업주를 아버지 ㄴ씨로 변경해달라”고 신청했다. 국민연금공단은 국세청 결정이 있었던 2020년 2월자로 사업주 명의를 바꾸면서, 그 이전 시기까지 소급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통지했다. 2015~2016년에 미납한 국민연금 납부 의무가 유지된 셈이어서 ㄱ씨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국민연금공단이 이 사건 사업주 변경을 처음 사업자 신고가 이뤄졌던 2015년 9월로 소급해서 해야한다고 판단했다. 국세청이 이미 부가가치세 취소를 결정했던 점을 고려해 “법원 판결이나 행정심판 등 쟁송과정을 통해 당초부터 실제 사업주가 명백히 밝혀진 경우, 그 내용을 반영해 사업주를 소급 변경처리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며 ㄱ씨의 손을 들어줬다. ㄱ씨가 미납 국민연금액을 납입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남아있는 국민연금 보험료 4910만원의 부과 자체는 적법하다고 봤다. 국민연금공단에는 명의상 사업주와 실제 사업주가 일치하는지에 관한 실질적 심사권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ㄱ씨와 국민연금공단이 둘 다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확정됐다. 국민연금공단은 법원 판결 내용에 따라 미납 보험료 4910만원을 숨진 ㄴ씨 앞으로 부과한 뒤, 관련한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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